티나 모도티 Tina Modotti
(1896~1942)
1942년 1월 6일 새벽이었다. 새벽 1시경에 이탈리아 태생인 티나 모도티는 집으로 가기 위해 멕시코에서 망명 중이던 건축가이자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지도자인 한네스 마이어의 집을 나왔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여행이 된다. 그녀는 택시 뒷자석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사들은 45살 된 이 여인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진단했다. 후에 이루어진 부검결과도 심장마비였다. 상당수가 정치적 망명인들이었던 그녀의 친구들과 동지들 사이에 모도티의 사망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곧이어 스탈린 요원이 타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이때 특히 자주 거론된 이름이 바로 ‘비토리오 비달리’라고 불리는 카를로스이다. 그는 모도티의 마지막 애인이자 멕시코에서 활동하던 스탈린의 하수인이었다. 모도티는 얼마전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살인자다. 그는 나를 끔찍한 범행에 연루시켰다. 그가 너무도 증오스럽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야만 한다. 죽을 때까지.”
20세기 초반 가장 다양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 중 한 명이었던 그녀는 비극적이고도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다. 모도티는 생전에 정치적인 이해관계의 변화에 따라 한편으로는 전설적인 대상, 미화된 대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어느 한쪽에 독점되고 낙인이 찍힌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여류사진가이자 예술가라는 측면은 혁명적 여전사이면서 반파시스트 혹은 초기 여성운동가라는 이미지로 인해 종종 주목받지 못하기도 한다. 비록 그녀의 사진작품이 그녀의 삶에서는 한낱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고 보존되어 있는 작품이 400점 정도로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오늘날 20세기 초반의 가장 중요한 사진업적에 해당된다.
아름다움과 스캔들, 예술과 공산주의로 점철된 모도티의 부단한 삶은 1896년 이탈리아 우다인에서 시작된다. 소박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공장 여직공 생활을 한 그녀는 1913년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온다. 언어에 재능도 있는데다 사랑스러우면서도 젊은 이 아가씨는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장에서 생활비를 벌었으나, 그녀가 지난 낭만적인 아름다움 덕분에 곧 모델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곧 이탈리아 이주민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극단에 출연한다. 1915년에는 ‘파나마 태평양 전시회’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극과 예술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그녀는 24세 된 잘 생긴 화가이자 시인인 로보(루베 드 라브리 리치)를 알게 되고 1917년에 그와 결혼했다. 그를 통해 그녀는 캘리포니아의 아방가르드적인 예술가 동아리, 즉 보헤미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모도티는 연극에 열광했고 연극무대에서 꽤 괜찮은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마침내 1920년대 초에는 할리우드에서 촬영된 여러 편의 무성영화에서 유혹적인 이방인의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호랑이 외투>에서는 드디어 주연을 맡는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이 할리우드의 피상적인 모습에 등을 돌렸다. 그녀에게 더욱 성과가 있었던 것은 LA에서 예술가 그룹들과 맺은 관계였는데, 그 관계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바로 성공적인 사진가 에드워드 웨스턴이었다. 우선 모도티는 모델로 웨스턴의 사진작업을 도왔다. 그녀는 이 활동을 아주 진지하게 여겼고, 이 공동작업의 결과들을 사진가와 모델이 함께 이뤄낸 공동의 업적에 간주했다. 이렇게 훗날 수년간 지속된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사진 역사상 가장 흥미롭고 창조적인 파트너 관계가 시작된다.
티나가 계속해서 웨스턴과 접촉하자 예민한 로보는 멕시코로 떠나고, 예기치 않게도 천연두로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모도티는 1922년 초 멕시코로 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후원자이자, 친구, 그리고 연인으로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명한 벽화 화가 디에고 리베라도 알게 된다. 1923년 마침내 사진을 배우기 위해 웨스턴과 함께 멕시코로 돌아온다. 아마 그 두 사람은 모험과 낭만을 찾아서 그곳으로 왔을 것이다. 웨스턴은 아틀리에를 보조한 그녀의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사진기술을 전수하겠노라는 내용의 계약을 맺는다.
모도티는 곧 열정적인 여류사진가로 성장했고, 그녀의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자립했다. 자신의 동반자와는 달리 그녀는 멕시코와 멕시코의 문화 그리고 그곳 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사랑을 품었다. 그녀는 혁명 이후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화적 변혁에 매혹되었다. 때문에 그들의 집은 혁명적인 멕시코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가 된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티나를 사랑했고, 또 실제로 몇 명은 티나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웨스턴을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했음이 틀림없다. 비록 이 두 사람이 다시는 만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930년대까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보낸 세월은 모도티의 사진작업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웨스턴의 청교도적인 미학에서 점점 더 멀어지며, 자신이 매일 목격하는 삶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녀는 이제 젖을 물리는 아낙네들이나 집회중인 노동자들, 긍지를 지닌 인디오 여성들 그리고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회적 낭만주의의 영향이 배어 있는 사진들도 촬영한다. 그녀는 그 외에 솜브레로, 망치, 낫 혹은 기관총용 탄피, 옥수수, 기타와 같은 제목을 단 정물사진처럼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띠거나 격정적으로 다가오는 사진들도 촬영한다.
모도티는 사회적 폐해를 없애기 위하여 멕시코의 좌파투쟁에도 참여했다. 사회적 문제와 변혁에 대한 예민한 직감이 현대미학과 잘 결합되어 있는 그녀의 수작 몇 점이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여류사진가는 1928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게 될 사람을 만난다. 그가 바로 쿠바의 혁명가인 홀리오 안토니오 멜라다. 그녀는 그의 곁에서 정치적 일에 몰두하면서 적극적인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1929년 1월 10일에 멜라가 모도티의 곁에서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비극이 찾아온다. 독재자 마차도의 사주였다고 추측되지만, 카를로스라고 불리는 사람의 지시였는지도 모른다. 그 배후에 정치적 음모가 깔려 있었지만, 가십을 원하는 여론은 ‘열정에서 비롯된 살인’으로 만들려 했다. 웨스턴이 촬영한 모도티의 나체사진이 증거로 제출되고, 근의 비도덕적인 성생활이 들추어진다. 심지어 그녀에게 살인공조혐의까지 씌어진다.
마음이 산산이 찢기고 얼굴도 폭삭 늙어버린 모도티는Modotti‘감정적인 망명’을 구한다. 그래서 모도티의 자서전 작가인 마거릿 훅스는 “전에 그녀는 하나의 사물에 전력투구하는 사진가였고, 그 당시 그녀는 사명을 띤 혁명 전사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그라플렉스 카메라로 《엘 마체테트》에 실을 사진을 찍기는 했지만, 자신의 정치적 일과를 위해 예술적 야망을 계속 포기한다. 더 이상 사진미학이 중요한 게 아니였다.
1년 뒤에 모도티는 좌파 행동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유럽으로 추방된다. 배에서 비토리오 비달리를 만나 모스크바로 가기로 마음을 바꾼다. 그전에 모도티는 반년 정도 베를린에 체류한다. 베를린에서 그녀는 사진가들 및 바우하우스 멤버들과 접촉도 하고, 스튜디오에 모도티의 사진을 전시한 여류사진가 로테 야코비와 함께 일하기도 한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사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심지어 새로운 사진을 촬영하기도 하지만, 이 새로운 환경에서 안정을 찾지 못한다. 게다가 라이카 카메라로 작업하는 것이 맞지도 않는 것 같았다(그녀는 자신의 그라플렉스 카메라를 멕시코에 그냥 두고 나와야만 했었다).
얼마 뒤 그녀는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정치적 투쟁에 몰두하고, 1930년대 초기에는 모든 지인과 관게절언을 선언한다. 1929년에는 멜라 사건에서 그녀를 지키고 변호했던 디에고 리베라와, 1930년대에는 에드워드 웨스턴과도 관계를 끊는다. 모도티는 곧 정치적 활동을 위해 사진과도 완전히 작별을 고한다. 훅스는 아마 그녀의 예술적 입장이 스탈린이 지시한 혁명적인 예술구상에 상응하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훗날 파블로 네루다는 이것을 다음처럼 묘사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카메라를 던져버리고 그녀의 삶을 공산당의 소박한 과제에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다.” 이것이 지나친 과장일지도 모르나 그녀는 스페인으로 떠날 때 분명히 자신의 사진들과 사진장비들을 모스크바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스페인 내전 중에 모도티는 여러 가명을 써가며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공화당 군대가 패배한 후에는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갔다가 미국이 미국시민권자인 자신의 입국을 거절하자, 1939년에는 마침내 별 감격도 없이 비토리오 비달리와 함께 멕시코로 되돌아온다. 그는 그녀의 예술적인 창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그는 모도티에게서 ‘티나 스탈리시마’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혁명을 꿈꾼 매혹적인 사진가 티나 모도티]
연인이자 스승이던 에드워드 웨스턴과 2인전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영화 '프리다'에서 프리다 칼로와 춤춘 아찔한 매력의 여인을 기억하는지. 영화배우 애슐리 쥬드가 카메오로 분해 출연했던 이 여 인이 당시 프리다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친구였던 티나 모도티(1896-1942)다.
멕시코 혁명에 투신했던 티나 모도티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와 백합 사 진을 찍은 사진작가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1991년 모도티가 찍은 '장미(Roses. 1925년작. 플래티넘 프린트)'가 뉴욕 소더 비 경매에서 당시 사진 경매 사상 최고가인 16만5천 달러에 낙찰되면서 모도티의 작 품 세계는 급속도로 부각되고 있다.
이탈리아 이민가족 출신인 모도티는 생계를 위해 미국에서 재봉사, 삼류영화배 우를 전전하다 1919년 사진역사의 거장 중 한 명인 에드워드 웨스턴(1886-1958)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모도티는 웨스턴의 아틀리에에서 조수로 일하며 사진을 배우고 연인이 되면서 웨스턴이 남긴 가장 뛰어난 초상사진의 누드 모델로 눈부신 여체를 드러낸다.
1923년 웨스턴과 함께 멕시코로 떠난 모도티. 웨스턴에게서 배운 사진기술은 모 도티 스스로 품고 있던 천재성과 만나면서 그후 8년간 만개한다.
모도티는 멕시코에서 당시 벽화운동을 이끌던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 케이로스 등 멕시코 지식인들과 만나면서 웨스턴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결국 1926년 웨스턴은 4년간의 멕시코 생활을 접고 혼자 캘리포니아행 열차에 오른다.
제자이자 뮤즈였던 모도티를 뒤로 하면서 그는 "멕시코를 떠나는 것은 바로 티나를 떠나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낡은 노트에 끄적인다.
사진이 회화와 결별을 선언한 20세기초, '근대 사진의 아버지'인 앨프리드 스티 글리츠를 중심으로 사진의 근본 능력을 인정해 대상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려는 스트 레이트 사진의 전통은 웨스턴과 모도티에게도 고스란히 투영됐다.
청담동 사진전문 갤러리 뤼미에르에서 10일부터 5월7일까지 웨스턴과 모도티의 열정과 낭만이 담긴 사진 36점을 만나 볼 수 있다.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한 웨스턴의 사막, 조개, 바위 등과 그가 아주 즐겨 찍었던 누드 사진 16점이 왔다.
또 웨스턴을 사사했지만 아주 다른 스타일로 정밀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 도 멕시코 민중의 척박한 삶을 가슴 뭉클하게 포착해 낸 모도티의 '동정', '삽을 든 손' 등과 유명한 '로즈', '백합' 등 20점을 보통 사용되는 젤라틴 실버가 아니라 포근하게 반짝이는 플래티넘 프린트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입장료 일반 5천원, 학생 4천원. ☎02-517-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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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모도티
마거릿 훅스 지음・윤길순 옮김
티나 모도티,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 <릴리>를 찍은 20세기 최고의 여성 사진가이자, <망치와 낫>, <깃발을 든 멕시코 여인>을 찍으며 20세기 혁명의 대열에 동참한 활동가였다. 또한 자신의 욕망을 움직이는 모든 것에 솔직하게 온몸을 내맡기는, 당대에 보기 드물게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다.
「티나 모도티」는 여성 인물의 재조명에 노력해 온 마거릿 훅스가 수년간 멕시코에 체류하며 집필한 책으로, 모도티의 삶과 예술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1년 소더비 경매장이 모도티의 작품 <장미>를 주목하자 세상은 그녀를 기억해 냈고, 마거릿 훅스가 이 책의 초판을 펴낸 1993년 이후 모도티에 대한 연구와 전시회는 일순간 증가했다. 모도티가 우리나라에 단행본으로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임이다.
현실과 이상, 예술과 혁명 사이를 오가며 이루어진 모도티의 삶은 오늘 우리의 열정을 자극한다. 무수한 애인들이 그늘과 혁명의 연기를 걷어내고 현대 사진의 선구자로 재평가되는 것 이상으로 티나 모도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결코 삶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으며 쉬운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티나 모도티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전으로 평가받는 이 책이 저자의 바람대로 그녀의 삶과 예술을 공정하게 드러내어 여성이자 예술가로서 그녀를 자기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할 것이다.
해남출판사 발행. 4×6배 변형판, 양장본 416쪽, 값 2만 7천원
연락처/ 02-326-1600
「티나 모도티」
마가릿 훅스 지음/해냄/416쪽/27000원
20세기 가장 유명한 여성 사진가 티나 모도티(1896~1942)의 평전. 여성 인물의 재조명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온 저널리스트인 저자 마가릿 훅스는 배우이자 사진가, 혁명가인 티나 모도티를 생생하게 ‘부활‘시키고 있다.
‘깃발을 든 멕시코 여인’, ‘들보를 들고 나가는 노동자’ 등 혁명적인 사진과 1991년 소더비가 격찬한 사진 ‘장미‘의 작가이기도 한 티나 모도티. 평전에는 그녀의 작업만큼 용기 있고 다채로운 티나 모토티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다.
프리다 칼로의 동지이자,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의 연인, 반 파시즘 운동가로 알려진 티나 모도티의 삶과 예술을 이 책은 구체적인 기록과 사진으로 복원한다
(1896~1942)
1942년 1월 6일 새벽이었다. 새벽 1시경에 이탈리아 태생인 티나 모도티는 집으로 가기 위해 멕시코에서 망명 중이던 건축가이자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지도자인 한네스 마이어의 집을 나왔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여행이 된다. 그녀는 택시 뒷자석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사들은 45살 된 이 여인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진단했다. 후에 이루어진 부검결과도 심장마비였다. 상당수가 정치적 망명인들이었던 그녀의 친구들과 동지들 사이에 모도티의 사망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곧이어 스탈린 요원이 타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이때 특히 자주 거론된 이름이 바로 ‘비토리오 비달리’라고 불리는 카를로스이다. 그는 모도티의 마지막 애인이자 멕시코에서 활동하던 스탈린의 하수인이었다. 모도티는 얼마전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살인자다. 그는 나를 끔찍한 범행에 연루시켰다. 그가 너무도 증오스럽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야만 한다. 죽을 때까지.”
20세기 초반 가장 다양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 중 한 명이었던 그녀는 비극적이고도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다. 모도티는 생전에 정치적인 이해관계의 변화에 따라 한편으로는 전설적인 대상, 미화된 대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어느 한쪽에 독점되고 낙인이 찍힌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여류사진가이자 예술가라는 측면은 혁명적 여전사이면서 반파시스트 혹은 초기 여성운동가라는 이미지로 인해 종종 주목받지 못하기도 한다. 비록 그녀의 사진작품이 그녀의 삶에서는 한낱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고 보존되어 있는 작품이 400점 정도로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오늘날 20세기 초반의 가장 중요한 사진업적에 해당된다.
아름다움과 스캔들, 예술과 공산주의로 점철된 모도티의 부단한 삶은 1896년 이탈리아 우다인에서 시작된다. 소박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공장 여직공 생활을 한 그녀는 1913년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온다. 언어에 재능도 있는데다 사랑스러우면서도 젊은 이 아가씨는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장에서 생활비를 벌었으나, 그녀가 지난 낭만적인 아름다움 덕분에 곧 모델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곧 이탈리아 이주민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극단에 출연한다. 1915년에는 ‘파나마 태평양 전시회’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극과 예술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그녀는 24세 된 잘 생긴 화가이자 시인인 로보(루베 드 라브리 리치)를 알게 되고 1917년에 그와 결혼했다. 그를 통해 그녀는 캘리포니아의 아방가르드적인 예술가 동아리, 즉 보헤미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모도티는 연극에 열광했고 연극무대에서 꽤 괜찮은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마침내 1920년대 초에는 할리우드에서 촬영된 여러 편의 무성영화에서 유혹적인 이방인의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호랑이 외투>에서는 드디어 주연을 맡는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이 할리우드의 피상적인 모습에 등을 돌렸다. 그녀에게 더욱 성과가 있었던 것은 LA에서 예술가 그룹들과 맺은 관계였는데, 그 관계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바로 성공적인 사진가 에드워드 웨스턴이었다. 우선 모도티는 모델로 웨스턴의 사진작업을 도왔다. 그녀는 이 활동을 아주 진지하게 여겼고, 이 공동작업의 결과들을 사진가와 모델이 함께 이뤄낸 공동의 업적에 간주했다. 이렇게 훗날 수년간 지속된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사진 역사상 가장 흥미롭고 창조적인 파트너 관계가 시작된다.
티나가 계속해서 웨스턴과 접촉하자 예민한 로보는 멕시코로 떠나고, 예기치 않게도 천연두로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모도티는 1922년 초 멕시코로 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후원자이자, 친구, 그리고 연인으로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명한 벽화 화가 디에고 리베라도 알게 된다. 1923년 마침내 사진을 배우기 위해 웨스턴과 함께 멕시코로 돌아온다. 아마 그 두 사람은 모험과 낭만을 찾아서 그곳으로 왔을 것이다. 웨스턴은 아틀리에를 보조한 그녀의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사진기술을 전수하겠노라는 내용의 계약을 맺는다.
모도티는 곧 열정적인 여류사진가로 성장했고, 그녀의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자립했다. 자신의 동반자와는 달리 그녀는 멕시코와 멕시코의 문화 그리고 그곳 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사랑을 품었다. 그녀는 혁명 이후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화적 변혁에 매혹되었다. 때문에 그들의 집은 혁명적인 멕시코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가 된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티나를 사랑했고, 또 실제로 몇 명은 티나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웨스턴을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했음이 틀림없다. 비록 이 두 사람이 다시는 만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930년대까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보낸 세월은 모도티의 사진작업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웨스턴의 청교도적인 미학에서 점점 더 멀어지며, 자신이 매일 목격하는 삶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녀는 이제 젖을 물리는 아낙네들이나 집회중인 노동자들, 긍지를 지닌 인디오 여성들 그리고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회적 낭만주의의 영향이 배어 있는 사진들도 촬영한다. 그녀는 그 외에 솜브레로, 망치, 낫 혹은 기관총용 탄피, 옥수수, 기타와 같은 제목을 단 정물사진처럼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띠거나 격정적으로 다가오는 사진들도 촬영한다.
모도티는 사회적 폐해를 없애기 위하여 멕시코의 좌파투쟁에도 참여했다. 사회적 문제와 변혁에 대한 예민한 직감이 현대미학과 잘 결합되어 있는 그녀의 수작 몇 점이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여류사진가는 1928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게 될 사람을 만난다. 그가 바로 쿠바의 혁명가인 홀리오 안토니오 멜라다. 그녀는 그의 곁에서 정치적 일에 몰두하면서 적극적인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1929년 1월 10일에 멜라가 모도티의 곁에서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비극이 찾아온다. 독재자 마차도의 사주였다고 추측되지만, 카를로스라고 불리는 사람의 지시였는지도 모른다. 그 배후에 정치적 음모가 깔려 있었지만, 가십을 원하는 여론은 ‘열정에서 비롯된 살인’으로 만들려 했다. 웨스턴이 촬영한 모도티의 나체사진이 증거로 제출되고, 근의 비도덕적인 성생활이 들추어진다. 심지어 그녀에게 살인공조혐의까지 씌어진다.
마음이 산산이 찢기고 얼굴도 폭삭 늙어버린 모도티는Modotti‘감정적인 망명’을 구한다. 그래서 모도티의 자서전 작가인 마거릿 훅스는 “전에 그녀는 하나의 사물에 전력투구하는 사진가였고, 그 당시 그녀는 사명을 띤 혁명 전사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그라플렉스 카메라로 《엘 마체테트》에 실을 사진을 찍기는 했지만, 자신의 정치적 일과를 위해 예술적 야망을 계속 포기한다. 더 이상 사진미학이 중요한 게 아니였다.
1년 뒤에 모도티는 좌파 행동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유럽으로 추방된다. 배에서 비토리오 비달리를 만나 모스크바로 가기로 마음을 바꾼다. 그전에 모도티는 반년 정도 베를린에 체류한다. 베를린에서 그녀는 사진가들 및 바우하우스 멤버들과 접촉도 하고, 스튜디오에 모도티의 사진을 전시한 여류사진가 로테 야코비와 함께 일하기도 한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사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심지어 새로운 사진을 촬영하기도 하지만, 이 새로운 환경에서 안정을 찾지 못한다. 게다가 라이카 카메라로 작업하는 것이 맞지도 않는 것 같았다(그녀는 자신의 그라플렉스 카메라를 멕시코에 그냥 두고 나와야만 했었다).
얼마 뒤 그녀는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정치적 투쟁에 몰두하고, 1930년대 초기에는 모든 지인과 관게절언을 선언한다. 1929년에는 멜라 사건에서 그녀를 지키고 변호했던 디에고 리베라와, 1930년대에는 에드워드 웨스턴과도 관계를 끊는다. 모도티는 곧 정치적 활동을 위해 사진과도 완전히 작별을 고한다. 훅스는 아마 그녀의 예술적 입장이 스탈린이 지시한 혁명적인 예술구상에 상응하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훗날 파블로 네루다는 이것을 다음처럼 묘사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카메라를 던져버리고 그녀의 삶을 공산당의 소박한 과제에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다.” 이것이 지나친 과장일지도 모르나 그녀는 스페인으로 떠날 때 분명히 자신의 사진들과 사진장비들을 모스크바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스페인 내전 중에 모도티는 여러 가명을 써가며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공화당 군대가 패배한 후에는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갔다가 미국이 미국시민권자인 자신의 입국을 거절하자, 1939년에는 마침내 별 감격도 없이 비토리오 비달리와 함께 멕시코로 되돌아온다. 그는 그녀의 예술적인 창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그는 모도티에게서 ‘티나 스탈리시마’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혁명을 꿈꾼 매혹적인 사진가 티나 모도티]
연인이자 스승이던 에드워드 웨스턴과 2인전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영화 '프리다'에서 프리다 칼로와 춤춘 아찔한 매력의 여인을 기억하는지. 영화배우 애슐리 쥬드가 카메오로 분해 출연했던 이 여 인이 당시 프리다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친구였던 티나 모도티(1896-1942)다.
멕시코 혁명에 투신했던 티나 모도티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와 백합 사 진을 찍은 사진작가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1991년 모도티가 찍은 '장미(Roses. 1925년작. 플래티넘 프린트)'가 뉴욕 소더 비 경매에서 당시 사진 경매 사상 최고가인 16만5천 달러에 낙찰되면서 모도티의 작 품 세계는 급속도로 부각되고 있다.
이탈리아 이민가족 출신인 모도티는 생계를 위해 미국에서 재봉사, 삼류영화배 우를 전전하다 1919년 사진역사의 거장 중 한 명인 에드워드 웨스턴(1886-1958)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모도티는 웨스턴의 아틀리에에서 조수로 일하며 사진을 배우고 연인이 되면서 웨스턴이 남긴 가장 뛰어난 초상사진의 누드 모델로 눈부신 여체를 드러낸다.
1923년 웨스턴과 함께 멕시코로 떠난 모도티. 웨스턴에게서 배운 사진기술은 모 도티 스스로 품고 있던 천재성과 만나면서 그후 8년간 만개한다.
모도티는 멕시코에서 당시 벽화운동을 이끌던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 케이로스 등 멕시코 지식인들과 만나면서 웨스턴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결국 1926년 웨스턴은 4년간의 멕시코 생활을 접고 혼자 캘리포니아행 열차에 오른다.
제자이자 뮤즈였던 모도티를 뒤로 하면서 그는 "멕시코를 떠나는 것은 바로 티나를 떠나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낡은 노트에 끄적인다.
사진이 회화와 결별을 선언한 20세기초, '근대 사진의 아버지'인 앨프리드 스티 글리츠를 중심으로 사진의 근본 능력을 인정해 대상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려는 스트 레이트 사진의 전통은 웨스턴과 모도티에게도 고스란히 투영됐다.
청담동 사진전문 갤러리 뤼미에르에서 10일부터 5월7일까지 웨스턴과 모도티의 열정과 낭만이 담긴 사진 36점을 만나 볼 수 있다.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한 웨스턴의 사막, 조개, 바위 등과 그가 아주 즐겨 찍었던 누드 사진 16점이 왔다.
또 웨스턴을 사사했지만 아주 다른 스타일로 정밀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 도 멕시코 민중의 척박한 삶을 가슴 뭉클하게 포착해 낸 모도티의 '동정', '삽을 든 손' 등과 유명한 '로즈', '백합' 등 20점을 보통 사용되는 젤라틴 실버가 아니라 포근하게 반짝이는 플래티넘 프린트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입장료 일반 5천원, 학생 4천원. ☎02-517-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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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모도티
마거릿 훅스 지음・윤길순 옮김
티나 모도티,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 <릴리>를 찍은 20세기 최고의 여성 사진가이자, <망치와 낫>, <깃발을 든 멕시코 여인>을 찍으며 20세기 혁명의 대열에 동참한 활동가였다. 또한 자신의 욕망을 움직이는 모든 것에 솔직하게 온몸을 내맡기는, 당대에 보기 드물게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다.
「티나 모도티」는 여성 인물의 재조명에 노력해 온 마거릿 훅스가 수년간 멕시코에 체류하며 집필한 책으로, 모도티의 삶과 예술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1년 소더비 경매장이 모도티의 작품 <장미>를 주목하자 세상은 그녀를 기억해 냈고, 마거릿 훅스가 이 책의 초판을 펴낸 1993년 이후 모도티에 대한 연구와 전시회는 일순간 증가했다. 모도티가 우리나라에 단행본으로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임이다.
현실과 이상, 예술과 혁명 사이를 오가며 이루어진 모도티의 삶은 오늘 우리의 열정을 자극한다. 무수한 애인들이 그늘과 혁명의 연기를 걷어내고 현대 사진의 선구자로 재평가되는 것 이상으로 티나 모도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결코 삶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으며 쉬운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티나 모도티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전으로 평가받는 이 책이 저자의 바람대로 그녀의 삶과 예술을 공정하게 드러내어 여성이자 예술가로서 그녀를 자기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할 것이다.
해남출판사 발행. 4×6배 변형판, 양장본 416쪽, 값 2만 7천원
연락처/ 02-326-1600
「티나 모도티」
마가릿 훅스 지음/해냄/416쪽/27000원
20세기 가장 유명한 여성 사진가 티나 모도티(1896~1942)의 평전. 여성 인물의 재조명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온 저널리스트인 저자 마가릿 훅스는 배우이자 사진가, 혁명가인 티나 모도티를 생생하게 ‘부활‘시키고 있다.
‘깃발을 든 멕시코 여인’, ‘들보를 들고 나가는 노동자’ 등 혁명적인 사진과 1991년 소더비가 격찬한 사진 ‘장미‘의 작가이기도 한 티나 모도티. 평전에는 그녀의 작업만큼 용기 있고 다채로운 티나 모토티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다.
프리다 칼로의 동지이자,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의 연인, 반 파시즘 운동가로 알려진 티나 모도티의 삶과 예술을 이 책은 구체적인 기록과 사진으로 복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