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진가

노부요시 아라키 Nobuyoshi Araki

쑤컷. 2006. 3. 10. 01:06
노부요시 아라키 Nobuyoshi Araki
(1940~ )

아라키는 마치 기어를 넣은 차처럼 이것저것 정신없이 찍어댔다. 구름 낀 하늘, 욕조 속을 바라보는 눈길, 고양이들, 도시풍경, 꽃과 나체사진까지. 이 사진들을 보면 지칠 줄 모르는 이 사진수집가가 모든 순간을 사진에 붙잡아두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일 찍어대는 사진들은 그에게 "미래의 계획과 함께 과거를 담고 있는 일종의 일기였다." 그는 하루에 80통이 넘는 필름을 사용하는 일이 잦았는데, 사진을 많이 찍으면 찍을수록 자신의 작업이 더 일찍 '무한한 차원ㅇ'에 도달하고 일종의 '부처의 만다라'가 된다고 생각했다.

사진가 스스로가 이 사진의 홍수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잣대였다. 그는 사진으로 공적, 사적, 심지어 내밀한 생활공간이 골고루 스며들어 사랑과 갈망, 시작과 종말로 한 덩어리를 이루는 사진 소설을 만들었다. 그사이 그의 사진은 250권이 넘는 책으로 나왔다.

이러한 강박적 시도의 시작은 자신의 신혼여행을 일종의 시각적인 일기로 만들면서부터다. 이 신혼여행 사진을 몇 장씩 모은 것이 1971년에 『감상적인 여행』 『겨울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이것은 '가장 순수한 그의 책'으로 간주된다. 그는 여기에서 이전까지 자신이 사용하던 기존의 모든 형태와 미의 표본에 어긋나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 침침한 흑백사진 속에는 그의 아내 요코가 있었다. 신칸센에 앉아 있는 텅빈 눈길의 요코, 황량한 호텔 방에 나체로 있는 요코, 섹스 할 때의 얼굴표정 등등, 모두가 신혼여행의 낭만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극단적인 사진들이었다. 아라키는 오늘날가지 그의 작품에 흐르는 테마인 삶과 죽음, 성과 도시와 무의식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그의 원래 의도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영화와 사진을 공부했으나, 주된 관심은 이탈리아 신사실주의 스타일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로베르토로셀리니와 비토리오 데시카가 만든 영화의 기록적인 성향을 높이 평가했고, 이것을 자신의 영화에서도 사용하려고 했다. 사진으로는 생계비를 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계속 이런 식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으며, 피상적인 패션사진에서 등 돌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방향전환은 궁극적으로 그의 아내 요코 때문이었다. 이후 아라키는 주관적인 색채가 강한 사진을 고수한다.

그가 광고회사에 일한 경험은 헛되지 않았다. 이 회사는 자신의 행위를 상업화하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아라키가 1972년에 그곳을 그만두고 다른 종류의 사진을 찍기로 결심한 후에 그는 자신의 명성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외국에서도 그의 작업을 인정하기 시작한 19990년대 중반, 아라키는 일본에서는 이미 슈퍼스타가 된 지 오래였다. 그가 카메라를 메고, 한 무리의 조수들, 스타일리스트, 사진이 잘 받는 여자나 보기 싫은 구석을 찾아 도쿄 홍등가를 전전하는 매니저들을 동반하고 나타나면, 대중스타처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멈춰 서서 수군거리거나 손을 흔들었다. 야쿠자는 그를 가리켰고 여학생들은 사진을 찍어주기를 바라며 몰려들었다. 그 방식은 그에게 미친 예술가라는 명성뿐만 아니라 불결한 포르노그래피 사진가라는 오명도 안겨주었다.

사실 아라키가 찍은 손발 묶인 나체 미인들과 노출된 생식기 사진들은 처음에는 싸구려 잡지, 새디즘이나 매저키즘을 다룬 잡지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포르노그래피로만 해석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인 시각이다. 왜냐하면 나체사진이나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찍은 사진은 그가 '영혼의 묘사'라고 이해한 포괄적인 모티프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가장 선호하던 테마가 성적인 상상을 연출하는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묶여 있지만 세련되게 과시하듯 보여주는 여성의 몸은 엘리자베스 브론펜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만 어느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에게 성적 상상을 만족시키기보다는 성과 폭력 그리고 죽음을 연결하는 메타포로 사용되었다. 창피와 죄책감은 모델과 사진가에게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 몸을 사슬로 묶는 행위조차 자발적으로 행해졌다. 이때 그가 가치를 부여한 대목은 모델이 수동적 촬영대상으로 축소되지 않고, 같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연출에서 중요한 부분은 퍼포먼스가 행해질 때 모델과 사진 간의 교류였다.

일본에서 그러한 사진은 에도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당시 성은 상당한 자유를 만끽했고 육체적인 사랑을 묘사하는 것이 터부시되지 않았다. 이것이 아라키가 일본에서 누리는 명성을 부가적으로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의 사진들은 얼마 전가지도 음모묘사가 허용되지 않았던 일본에서 유럽보다는 훨씬 덜 사람들을 흥분시킨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포르노그래피와 예술, 고급예술과 저급한 예술간의 경계가 정확히 분리되어 있다. 비판하는 사람들만이 그의 ‘지저분한 예술’이 미술관에 입성하여 고상하게 되는 것을 조롱하는 것은 아니다.


생애

노부요시 아라키는 1940년 5월 24일에 도쿄에서 상점주인의 아들로 태어난다. 12세 때 도쿄의 지바 대학에서 사진과 영화를 공부하고 1963년에 일본 최대 광고에이전시인 덴츠에서 일한다. 1965년에는 첫 개인전을 갖는다. 1970년대부터 아라키는 사진에 전념하는데, 국숫집과 바에 여성 생식기를 클로즈업한 사진을 전시하면서 처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다음해에는 요코 아오키와 결혼하고 그녀와 함께 공동작업을 시작한다. 기존통념을 깬 그의 첫 사진집 『감상적인 여행』이 출판된다.

1972년에 자신의 사진을 복사하고 그것을 작은 사진첩으로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내거나 전화번호부에서 무작위로 뽑은 주소로 보내는 사진 ‘전시회’를 연다. 2년 뒤에 1976년에 문을 닫은 ‘포토 워크숍 스쿨’을 창립한다. 아라키는 그후 10명 정도의 학생들을 모아 사적인 사진학교를 연다. 1981년에 ‘아라키네마’라는 이름으로 두 대의 프로젝터를 사용해 특수 슬라이드 쇼를 개설한다. 계속 검열에 걸리고 몇 번이나 전시회도 무산된다. 1988년에 《포토 에이지》라는 잡지는 경찰의 지시로 그의 사진을 게재하지 않는다.

1990년에 아내 요코가 42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다. 아라키 자신은 이 해에 일본사진협회로부터 상을 받는다. 1992년에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공원 포럼에서 그의 첫 유럽 개인전을 갖는다. 같은 해 도쿄의 EGG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포토마니아 다이어리 사진전’은 결찰에 의해 중단되고 아라키는 공중도덕위반혐의로 고발된다. 1974년에 그의 첫 갱니전이 미국에서 열린다. 1966-67년에 총 20권 분량의 책이 『노부요시 아라키의 작품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현재 도쿄에 살고 있다.


일본사진

일본 사진은 사진매체가 등장하기 시작한 19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처음으로 일본적인 특색을 지닌 사진이 생겨난다. 세기 전환기 이후 이론 사진은 서구 예술사진을 상당히 많이 수용했고, 후에는 신즉물주의나 사진르포와 같은 유럽 사진 발전을 모범으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 사진에 독창적인 기여를 한 최초의 인물은 켄도몬과 이헤이 기무라였다. 그들의 작품은 전후가 되어서야 효력을 발휘했다. 전후 일본 사진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 사진가로는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매그넘에 들어간 히로시 하마야와 다이코 호소에 그리고 쇼지 우에다가 있다. 이 ‘옛 대가들’의 뒤를 잇는 그 다음 세대는 윌리엄 클라인이나 로버트 프랭크와 같은 미국 사진가들을 모범으로 삼아 사진을 시작해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사진양식을 발전시킨다. 이들에 속하는 인물이 노부요시 아라키 외에 쇼메이 토마츠, 다이도 모리야마 혹은 이코 나하라 등이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토시오 시바타, 아키코 노무라, 류지 미야모토, 야스마사 모리무라 혹은 마리코 모리와 같은 젊은 사진가들의 작업에 다양한 인상을 남겼다. 이 사진가 세대는 유럽과 미국에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평가

노뷰요시 아라키가 삶과 죽음, 도시와 성이라는 테마와 벌인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대결은 거의 강박적인 특징마저 보인다. 그는 자신이 찍은 도발적인 여성의 나체사진과 결박사진으로 인해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으면서도 유명한 사진가가 되었다.